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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 
태조
현릉(顯陵) / 북한 개성시 해선리

2대 혜종
순릉(順陵) / 북한 개성시 용흥동

3대 정종
안릉(安陵) / 북한 개성시 고남리

4대 광종
헌릉(憲陵) / 북한 개성시

5대 경종 
영릉(榮陵) / 북한 개성시 개풍구역

6대 성종
강릉(康陵) / 개성시 판문구역 진봉리

7대 목종
의릉(義陵) / 북한 개성시

8대 현종
선릉(宣陵) / 북한 개성시 송악산 서쪽 언덕

9대 덕종
숙릉(肅陵) / 북한 개성시 해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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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정종(靖宗)
주릉(周陵) / 황해북도 개성시 해선리

11대 문종
경릉(景陵) / 황해북도 장풍군 대덕산리

12대 순종
성릉(成陵) / 개성시 판문구역 대련리

13대 선종
인릉(仁陵) / 북한 개성시

14대 헌종
은릉(隱陵) / 위치 미상

15대 숙종
영릉(英陵) / 북한 개성 선적리

16대 예종
유릉(裕陵) / 북한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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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인종
장릉(長陵) / 개성시 개풍군 고남리

18대 의종
희릉(禧陵) / 개성 동쪽에 위치했다고 하나 

현재는 위치가 유실된 상태

19대 명종
지릉(智陵) / 개성시 장풍군 지릉리

20대 신종
양릉(陽陵) / 개성시 고남리

21대 희종
석릉(碩陵)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22대 강종
후릉(厚陵) /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

23대 고종
홍릉(洪陵) / 인천광역시 강화군

24대 원종
소릉(韶陵) / 개성시 룡흥리 내동

25대 충렬왕
경릉(慶陵) / 북한 개성시

26대 충선왕
덕릉(德陵) / 개성부 서쪽으로 12리에 

안장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 미상

27대 충숙왕
의릉(毅陵) / 황해북도 개성시

28대 충혜왕
영릉(永陵) / 개성 신효사 부근에 

묻혔다고 하나 현재 위치는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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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충목왕
명릉(明陵) / 개성시 연릉리

30대 충정왕
총릉(聰陵) / 개성시 오산리

31대 공민왕
현릉(玄陵) / 개성시 해선리

32대 우왕
능묘 - 미상 / 여주군 길천면 대왕리에 있었다고 추정

33대 창왕
능묘 - 미상 / 사망지 -고려 강화도

34대 공양왕
고릉(高陵) / 공양왕릉은 현재 두 곳이 전해지고 있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

 

 

#고려시대 #태조왕건 #고려시대왕 #고려유물 #고려왕릉

고려시대 드라마,고려시대 영화,드라마 태조 왕건,쌍화점 왕,
북한 유물,고려 북한 유물,고려시대 유물,고려 멸망 원인

태조 왕건부터 34대 공양왕까지 고려 왕들의 왕릉명과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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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삼국사기에 따르면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며, 
얼굴이 백옥같다고 기록

화랑 관창
용모가 우아하고 뛰어났다는 삼국사기 기록

백제 무왕
풍채가 빼어났다는 삼국사기 기록

문무왕 (신라)
용모가 영준하며 뛰어났다는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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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 (고구려)
얼굴이 수려하여 부친의 총애를 받았으며,
낙랑궁왕 최리가 그의 얼굴만 보고 귀한 집 
자제라 생각하였다고 함

장수왕 (고구려)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다는 기록

이자겸 (고려)
풍채가 맑으며 어진 이를 반기는 온화한 
성품을 지닌 자라고 평가 받음

고려 인종
키는 작지만 준수한 용모를 가졌다고 기록

정중부 (고려)
비범한 외모를 가진 장대한 거구의 미남이었다고 기록

태조 왕건
용모가 훤칠하고 잘생겼다는 기록 

김춘택 (조선)
수려한 외모와 타고난 신체로 그가 대궐을 나서면
궁녀들의 관심이 대단했다는 기록

김홍도 (조선)
눈매가 맑고 용모가 빼어나다는 

스승 강세황의 글이 있음 

문종 (조선)
풍채가 크고 수염이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를 지녔으며 명나라 사신들도 문종의 외모를 칭찬

연산군
키가 크고 하얀 피부에 고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

영조 (조선)
지금으로 치면 꽃미남과 같은 외모를 지녔었다고 평가

류성룡 (조선)
금옥처럼 아름다운 선비라는 선조의 말과 
일본과 명나라에서도 그를 미남이라고 평가

홍국영
얼굴 생김새가 준수하고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다는 기록

헌종 (조선)
준수한 외모에 큰 목소리가 금석에 

나오는 것 같다는 기록

 

 

 

조선시대 미남 미녀,조선왕 외모,조선시대 일화,한국사 이야기,
장수왕,미남 조선왕,사극드라마,사극 영화,태조 왕건,문무왕,백제 시대,
삼국시대 일화,백제 신라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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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태조
건원릉
경기 구리시 인창동 산 4-1

 

2대 정종
후릉
북한 개성시

 

3대 태종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4대 세종
영릉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5대 문종
현릉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6대 단종
장릉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7대 세조
광릉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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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예종
창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서오릉 경내

 

9대 성종
선릉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0대 연산군
연산군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11대 중종
정릉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2대 인종
효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13대 명종
강릉
서울시 노원구 화랑로

 

14대 선조
목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8-2

 

15대 광해군
광해군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16대 인조
장릉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17대 효종
영릉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18대 현종
숭릉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19대 숙종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대 경종
의릉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21대 영조
원릉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22대 정조
건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현륭원 국내 강무당 터

 

23대 순조
인릉
경기도 교하 장릉 좌측 언덕

 

24대 헌종
경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5대 철종
예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26대 고종
홍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27대 순종
유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조선왕릉 #세종대왕 #조선역사 #조선의왕

조선시대 왕들,조선시대 왕 무덤,숙종 장희빈,
연산군 묘,조선시대 영화,조선시대 드라마,광해군 묘,
사도세자,왕들의 수명,왕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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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조선)
180cm 

 

리처드 1세 (잉글랜드 국왕)
196cm

 

관우 (중국)
207cm

 

장비 (중국)
190cm

 

조자룡 (중국)
190cm

 

제갈량 (중국)
190cm

 

이순신 (조선)
187cm

 

표트르 1세 (러시아 황제)
203cm

 

#이순신 #이성계 #장신위인들 #조선의장군 #삼국지

한국 역사,세계 역사,한국사 비화,세계사 비화,
이순신 키,이순신 영화,이순신 장군,임진왜란 장군,
임진왜란 3대첩,이순신 장군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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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발명가이자 기업인인 토마스 에디슨은 백열전구,
축음기 등, 무려 1,300여 종의 발명품을 특허 낸 세기의 
발명왕으로 유명한데 축전지를 발명할 때는 2만 5천번의 
실험실패 끝에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디슨은 14년 동안 하루에 20시간씩 일을 하면서 제품 
발명에 자신의 모든것을 쏟아 부었는데 그런 노력으로도 
에디슨이 끝끝내 발명하지 못한 제품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영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전화기였다.

 

에디슨은 영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전화기 개발 노력을 
자신의 회고록에 상세히 기록한 바 있는데 1870년 후반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 소리를 증폭함으로써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전화기 발명 원리를 찾기 위해 고심했었고
그는 영혼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매우 수다스러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한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은 점점 발전해 나가는 
과학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연결하는 방법을 해결해줄 것으로 
믿고 있었고 당시까지 영혼에 대하여 믿지 않았던 에디슨은 
이 프로젝트를 맡게 된 이후부터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사람들은 에디슨이 이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에 대해 의아해 
했었다고 한다.

 

에디슨은 1920년부터 10년간 영국의 유명한 발명가였던
윌리엄 크룩스와 손잡고 영혼과 통화할 수 있는 전화기 
개발에 매진했지만 1931년 에디슨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결국 이 전화기는 발명되지 못했다.

 

에디슨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가 남긴 여러 전화 스케치를
바탕으로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이 전화기에 개발을 시도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 결과는 현재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역사비화 #세기의발명품 #역사이야기 #미국역사 #토마스에디슨

재미있는 역사이야기,실화 이야기,한국 역사,세계 역사,
신기한 역사,세계의 위인,재미있는 위인전,에디슨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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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명장으로 평가받던 김덕령 장군은 
그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억울
하게 죽음을 당한 인물인데 그가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것에 대해 문헌이나 구전 
자료에는 그의 출생 배경과 관련한 오묘한 이야기가 있다.

 

김덕령의 아버지는 주막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인물이었는데 어느 날 하루는 자신을 풍수가라 
소개하는 한 남자가 주막에 머무르면서 묫자리를 
보고 다녔고 김덕령 아버지에게 달걀을 하나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김덕령의 아버지는 풍수가에게 일반적인 달걀이 
아닌 곤달걀을 주었고 풍수가는 그날 새벽 산으로 
올라가 달걀을 묻고 새벽이 오길 기다렸는데 날이 
새도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풍수가는 낙심
하며 산에서 내려왔고

 

김덕령의 아버지는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모른 
척하고 있다가 풍수가가 다시 달걀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자 이번에는 멀쩡한 달걀을 주었다. 

풍수가가 전날 밤 곤달걀을 묻었던 자리에 이번에는 
온전한 달걀을 묻자, 그 자리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데 바로 그 자리가 달걀이 닭이 되는 
길지(吉地)였던 것이다.

 

풍수가는 김덕령의 아버지에게 은덩이를 건네주며 
몇달 후 다시 와서 은덩이를 더 줄테니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하고 떠나게 되고 풍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김덕령의 아버지가 그 자리를 보더라도 그 자리는 뛰어난 
명당자리임이 느껴졌고 풍수가가 떠나자, 김덕령의 아버지는 
그 묫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게 된다. 

 

몇달 후, 다시 돌아온 풍수가는 자신이 알아놓았던 묫자리를 
찾아갔지만 누군가 이미 묘를 쓴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자리를 자신에게 양보할 것을 요청했지만 
김덕령의 아버지는 이를 거절하였다.

 

풍수가는 양보를 안해도 좋으니까 묫자리의 안대(案帶)가 
틀렸으니 자신이 바로 잡아 주겠다고 했지만 그가 괜한 
해코지를 한다고 생각한 김덕령의 아버지는 그것마저 
거절하고 마는데 설화에는 그 묫자리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후에 태어난 김덕령이 제대로 뜻도 펴보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고 하며 묫자리의 안대(案帶)는 
틀렸지만 그 명당자리에 김덕령의 할아버지를 묻었기에 
김덕령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덕령의 용맹은 실로 대단하여,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백 근의 철퇴를 양 허리에 차고 다녔으며 왜장은 김덕령의 
얼굴만 보고도 두려워서 군대를 철수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김덕령은 용력이 있으면서도 
출전하지 않았다는이유로 나라에서 그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으나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는데
김덕령은 “나를 죽이려면 ‘만고충신 효자 김덕령’이란 
비를 써 달라.”고 요구하였고 “내 다리 아래의 비늘을 
뜯고 그곳을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로 세 번 
때리면 죽는다.”고 알려 주어 그렇게 하자 김덕령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덕령 장군은 죽은 후, 1661년 현종2년에 관직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며 그 누명이 
풀리게 되었는데 지금의 광주 충장로는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지명이다.

 

 

#김덕령장군 #조선시대장군 #한국사이야기 #역사비화 #세계사비화

임진왜란 시대 장군,조선시대 장군,한국사 위대한 장군들,
조선시대 일화,한국사 이야기,사극드라마,사극 영화,삼국시대 일화,
임진왜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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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14대 왕인 선조는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 하였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죽이라는 전교를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내린적이 있는데

이는 이순신이 왕의 명령을 어긴것이 아니라 
일본의 요시라라는 첩자의 허위정보를 선조는 그대로 믿고
이순신에게 출정명령을 내린 것이었으며

 

 

예리한 정보 분석력으로 이 정보가 허위라는 것을 간파한
이순신은 출정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국정보다는 자신의 안위 지키기에 바빴던
선조는 이순신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출정하지 않은것에 대해
이순신을 죽이라는 전교를 내리게 되고

 

 

일본의 간교한 술책에 넘어간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게끔 
하는게 일본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려고 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이순신이 억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왕에게 말을 하지 못하였고
그때 우의정을 지낸 지중추부사 정탁이 목숨을 

걸고 선조에게 상소를 하게 된다.

 

 

정탁의 목숨 건 절실한 상소문과 더불어 류성룡, 

이원익 등의 대신들도
이순신의 처벌을 반대하며 상소하였고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생각한 선조는
이순신에게 백의종군의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그치게 된다.

 

 

#이순신 #정탁 #선조 #조선간신배

이순신 선조,요시라,이순신 정탁,백의종군,조선의 충신,
조선시대 왕,조선 선조,임진왜란,노량 죽음의 바다,이순신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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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라 평가받는 조선 제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 몇가지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종은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세종을 왕위 계승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자로서의 임무보다는
여러 악기를 하사하며 편안히 궁중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요

 

이 당시부터 세종은 거문고와 가야금 연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나중에는 자신의 형들에게 악기연주를 
가르쳐 줄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고기를 매우 좋아하였기 때문에
비만으로 인한 여러가지 성인병에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요

 

아버지인 태종이 세종의 건강을 염려해 운동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의 육식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년상 중에는 고기를 먹을수 없지만 아들의 몸이
상할 것을 우려한 태종은 세종에게 고기반찬을
주라는 유언까지 남길 정도였는데요

 

효성이 지극했던 세종은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육식을 하지 않았으나 그로 인해 입맛을
잃어 보다 못한 신하들이 고기를 드시라고 
권유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고되고 힘들어지자
세종은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의미에서
백성들과 똑같은 초가집을 지어 2년동안 살았다고 하는데요

 

세종의 건강을 염려한 신하들이 세종 몰래 초가집
더미에 짚더미를 넣어 두었다가 이를 밣견한 세종에게
큰 꾸지람을 들었다고 합니다.

 

궁에서 일하는 노비 여성이 임신 한것을 알게 된
세종은 힘든 만삭의 몸으로 일하지 않도록 
출산 전 한달의 휴가를 부여하며 독려했다고 하는데요

 

또한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도 100일간의 출산휴가를
부여했으며 남자 노비들에게도 부인이 아이를 출산하면
30일간의 휴가를 주어 육아를 함께 할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눈이 아프면서 눈꼽이 끼는 병, 즉 안질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마저 불편함을 느끼면서 살았던
세종인데요, 그로 인해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고 합니다.

 

세종은 32년간의 재위 기간 중 약 20년 동안
시각에 의한 장애를 겪었으며 임종하기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고 합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장인이었던 심온을 숙청하게 되는데요
이로 인해  부인이었던 소헌왕후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여 소헌왕후가 임신을 했을때에는 건강하게 순산하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경복궁에 건순각이라는
분만실을 만들어 순산을 배려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신체에 장애를 가진 백성들이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멸시 당하는 것을 염려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데요

 

이에 악기연주를 할수 있는 시각장애인 중
신분이 천민인 자는 시험을 통하여 채용하도록
명 했으며 장애인 단체에는 노비와 식량을 지원해주며
장애인들의 직업훈련이 크게 도모되도록 하였습니다.

 

긴 흉년으로 나라 곳곳에서 백성들의 힘든 목소리가
들리자 왕가의 토지를 저렴한 가격에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던 세종인데요

 

수양대군을 포함한 모든 대군이 소유한 토지를
대폭 줄이며 힘든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장려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백성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힘든 일은
무엇인지 알기위해 투표를 통하여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실시했는데요

 

토지법 재정을 앞두고는 약 5개월 동안 백성들을
상대로 투표를 실시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진정으로 백성을 아끼는
애민정책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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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 연산군 10년 광기와 분노로 가득찬 얼굴을
하고 있던 연산군은 승지 강징을 불러 
지금 궁궐 내시들 가운데 고자가 아닌 자들이
고자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하니 너는 지금 당장 
의원들을 대동하여 내시들을 집합시킨 후 그들의
아랫도리를 조사하여 음경이 있는 자들을 색출하라고
지사했다고 하는데요

 

갑자기 연산은 왜 이와 같은 지시를 내린 것일까요?

 

1504년은 갑자사화가 시작된 해인데요
그 해 4월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숨을 거두면서 삽시간에 대궐은
파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연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고 죽은 자는 땅으로
파내어져 시신을 토막내는 끔찍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 되던 때에
대궐에서는 사람들을 긴장시키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잠실에서 일을 하는 한 여인이 내시 서득관과
간통을 하였다는 일이 사헌부에 접수되었고
이러한 일을 고발한 자는 다름 아닌 여인의
남편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연산은 돌연 내시들의
신체가 궁금해졌고 하여 내시들의
아랫도리를 조사하게 되는 희대의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내시들의 신체검사를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한 지 불과 보름만에 내시인 최수연이 
대궐을 출입하는 한 기생과 간통을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는데요

 

그 무렵 연산은 살육과 더불어 전국의 기생을
매일 같이 대궐에 불러 연회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연산은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은 후 내시부 수장
김처선을 불러 요즘 내시들이 자꾸 간통사건에
연루되는데 왜 이러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지
물어 봤는데요

 

이에 김처선은 내시들 중 일부는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욕정의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하자

 

연산은 고환이 없는데도 욕정을 느낄수 있냐고
물었고 아주 어릴때 거세를 한 자들은 그 감정을
모를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 거세를 한 내시들은
사춘기에 일어나는 감정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김처선이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잠시 고민을 하던 연산은 곧 모든 내시들을
선정전 앞으로 집합시키라 명하였고
이날 근무가 없는 내시들까지 대궐앞에 모이게 됩니다.

 

모든 내시가 모이자 연산은 목소리와 얼굴이 반반한
책비를 선정하여 그들 앞에서 남녀 사이 벌어지는
음란한 책 한권을 정독하도록 하였는데요

 

이런 묘안으로 잽아낸 내시가 있었으니 바로 
김세필이라는 내시였습니다.

 

그는 김처선도 아끼는 내시였는데요
조사를 진행해 보니 김세필은 궁녀에게 임신까지
시킨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김세필은 십대 후반에 궁궐에 들어와 거세를 한 뒤
내시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거세를 한 후 얼마 뒤 다시 살아나 궁녀를
간통하게 된것이며 이러한 것을 되살이 라고 불렀습니다.

 

왕은 김세필과 그의 양아버지인 최결까지 참형에 처하고
그들의 목을 모든 내시들이 보게 하였는데요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내시들의 간통사건은 
어느 정도 잠잠해지는 듯이 보였지만
넉달이 지난 후 1504년 9월 조선실록에 내시들의
신체조사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왕은 의약품을 관리하고 의원들을 뽑는 전의감 관리를
은밀히 불러 다시 한번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는데요

 

이에 전의감 소속 내시였던 이경과 석극산이라는
내시가 처음 조사 당시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조사에서 빠진것이 확인되었으며 그들이 음근이
살아있는 내시임이 밝혀졌습니다.

 

이후 이경과 석극산이 어떻게 처벌되었는지는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수 없다고 합니다.

 

이외에 조선역사에 내시의 간통 사건으로 가장 
놀라운 사건은 태조 1394년 경에 일어났던 세자빈 
현빈 유씨와 내시 이만의 간통 사건인데요

 

한 나라 세자의 아내가 내시와 궁궐에서 간통을
했다는 이야기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사건이며 당시 큰
층격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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