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메이저리거' 태그의 글 목록 :: 인생은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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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김병현

 

 

 

추신수

 

 

 

류현진

 

 

 

이 선수들과 같이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선수생활을 한 선수들과는 달리 

아쉽게 메이저리그 진출이 무산된 선수들이 있는데요.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 또는 부상 

그리고 복잡한 개인사정에 의해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된 선수들

 

 

 

 

과연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빅리그의 꿈이 

좌절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보급 투수, 무등산 폭격기, 나고야의 태양등의 

수식어로 불리였던 선동열은 우완 전통파 파이어볼러

투수로 강한 허리힘을 이용해 150키로대의 당대 

역대급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습니다.

 

 

 

당시 피지컬, 제구력, 주자견제능력, 멘탈, 경기운영

능력 등 투수로서는 모든걸 다 갖춘 투수였습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선동열은

9회까지 두점만을 내주고 완투승을 하며 메이저리그

영입경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앞날은 이제 해외진출이라는 방대한

꿈을 펼칠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요

 

 

 

본인도 그의 부모님도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그의 빅리그

진출을 가로막았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정치가 아닌 스포츠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했고 이제 막 인기를 얻게 된

한국프로야구에는 선동열이라는 대스타가 필요했던

필요했던 것입니다.

 

 

 

고려대학교 시절부터 한국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선동열은 1984년 다저스로부터 50만달러의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시받았다고 하는데요.

 

이는 국내 최초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제의였습니다.

 

 

 

병역문제 때문에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되었다고

알려져 왔었지만 안기부가 나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막았다는 뒤늦은 고백을 하면서 그의

야구사가 어느정도 밝혀졌습니다.

 

 

 

선동열은 올해 뉴욕 양키스로 

코치연수를 떠난다고 합니다.

 

현대 야구의 흐름을 공부하고 돌아오면 우리나라 

야구 발전에 이바지할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며

연수소감을 밝혔습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원년 OB베어스를 

우승으로 이끌며 불사조로 불리운 박철순은

데뷔 시즌의 임팩트만 놓고 보면 데뷔시즌의 

최동원이나 선동열 그 이상이었습니다.

 

 

 

35년전, 프로야구 출범 전 박철순 역시 빅리그란 

꿈을 구체화 시키며 

자신의 미래를 미국에서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마침내 미국 땅을 밟았지만 결국 꿈으로 남겨둬야 

했는데요, 과연 그에게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요?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해외 스카우트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국제 대회 뿐이었습니다. 

 

박철순은 이미 공군 소속 시절부터 에이스였는데요. 

 

1978년 5월 20일 열린 전국 야구대회에서 선발로

나와 완봉승을 거두며 팀을 22년 만에 

정상으로 이끌었습니다. 

 

 

 

큰 경기에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그 해 실업야구 올스타에 선정됐고 이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제25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뽑혔습니다. 

 

김응룡 감독을 사령탑으로 투수로는 

박철순과 최동원, 김시진, 야수로는 장효조, 김재박 등이

이름을 올린 ‘원조 드림팀’이었습니다. 

 

박철순은 

이듬 해 쿠바에서 열린 야구 월드컵에도 태극마크를 

달며 국가대표 고정 멤버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최동원과 함께 국내 대학리그를 평정한 

박철순은 2학년 재학 당시인 1979년 10월

미국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워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계약 내용은 계약금 1만 달러에 월봉 700달러. 

이듬 해 마이너리그에서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하는 

조건이었는데요.

 

 

 

그러나 메이저리그의 마운드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해 5월 박철순은 어깨 부상을 

당하며 경기는 커녕 연습에도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박철순을 스카우트 했던 밀워키 

구단의 산하 마이너리그의 총책임자 레이 포이테빈트는 

8월 “박철순이 부상에서 완쾌했고, 제 컨디션을 

완전히 되찾았다”며 “지금 상황만 유지한다면 

빅리그 승격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는데요,

 

 

 

박철순의 데뷔 시즌 성적은 싱글A리그에서 11경기에 

출전했고 이중에서 6경기를 선발로 등판하며 

최종성적은 3승 2패 평균자책점 2.31. 승수가 

적긴 했지만 당시 팀투수진들 중 평균자책점 

3위로 안정감을 자랑했습니다.

 

 

 

빅리그 입성도 머지 않은 듯 한 박철순에게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는데요. 

 

그 해 9월 6일 휴가차 귀국한 박철순은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자 복귀를 포기하고 OB 베어스와 총 4400만원에 

계약한 것입니다. 

 

 

 

당연히 원 소속 구단인 밀워키는 

발끈하며 계약 위반이라며 벌금으로 7만 달러를 내라고 

통보했습니다. 

 

계약서 상으로도 계약금 2만 달러를 

받고 1983 시즌까지 밀워키 산하 마이너구단에서 

뛰기로 했기 때문에 반박할 말도 없었습니다. 

 

박철순은 벌금이 얼마인지도 몰랐다며 액수를 

알고 보니 걱정이라고 말했다는데요 

 

프로라는 개념조차 

없던 당시의 한국야구가 낳은 헤프닝으로 

볼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최동원은 1978년 로마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열흘 동안 8경기 등판 38⅓이닝 투구를 시작으로 

80년 도쿄 세계야구선수권, 81년 대륙간컵국제야구대회

 

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연전연투했하며 81년 대륙간컵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9회 2아웃까지 퍼펙트게임을 했던 것이 

메이저리그 진출의 계기가 됐습니다.

 

 

 

1981년 9월 뉴욕타임즈는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보도했는데요, "토론토가 40인 로스터에 등록될 

역대 최초의 한국인 선수와 계약했다며 토론토 인사 

담당자는 한국을 방문해 23살 오른손 투수 최동원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최동원의 어머니는 "군대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당시엔 국제대회에 나가 우승을 해도 같은 종목에서 

5년 이상 종사해야 병역을 면제해줬다면서 

병역을 마치지 않으면 외국에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은 한국에 남아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토론토 교민과 일반 시민들이 아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서명운동을 했습니다. 그 서류가 정부 기관에 

도착했는데, '5년간 남겠다'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난 후에야 공개됐습니다. 최동원은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다. 한국에서 열심히 하겠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고 최동원의 동생 역시 그런 서류가 있었다는 

말은 형에게 들었다며 메이저리그든 일본이든 해외로 

진출하는 건 형이 최초였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라고 말하며 당시 정서는 지금처럼 외국 

진출을 밀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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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박찬호를 필두로 현재까지 여려명의 


한국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를 경험하였고


또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한국야구를 


경험 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 선수도


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간 사례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한국선수는 어떤 선수들이 있는지 


핵심적인 선수들만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처음으로 소개 해 드릴 선수는 국내 최초의 


메이저리거 코리안 특급 박찬호입니다.


94년 LA다저스에 입단하여 메이저리그 사상 17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에 입성한


박찬호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2년간의 마이너 


생활을 경험 후 96년 빅리그에 올라와서


시카고 컵스 리글리필드에서 대망의 첫승을 거두고 


이후 선발진에 당당히 합류하여


다저스 선발진의 1선발까지 꿰차게 되었습니다. 2002년 FA 자격을 


획득한 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였지만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발목을 잡아 먹튀라는 오명을 쓰고 


지지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불펜투수로 전환하여 필리스와 양키스를 


거쳐 또 다시 다저스의 불펜투수를 거쳐


피츠버그 파일럿츠에서 대망의 아시아 투수 최다승인 


124승을 거두고 빅리그를 떠납니다.


이후 1년간의 일본 오릭스 시절을 지나 한화에서 


다시 1년간의 선수생활을 


끝으로 그 화려했던 커리어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방면의 활동으로 선수시절 보여주지 못했던


박찬호의 일상생활과 재미있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를 응원합니다.




빅리그 1세대라고 불렸던 김병현, 서재응, 김선우, 봉중근 선수입니다.


이 중 단연 돋보였던 선수는 단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 시절의 김병현 일 것입니다.


디백스의 마무리를 맡으며 2001년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하였고, 보스턴 시절에는 


비록 월드시리즈 엔트리에는 들지 못하였지만 


또 한번 우승반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병현의 광주일고 선배인 서재응은 메츠 시절 날카로운 


제구력을 앞세워 당당히 선발진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서덕스라는 별명도 


이때 쯤 붙여진 별명입니다.


이후 다저스와 템파베이를 거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기아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우리의 써니 김선우 선수는 빅리그 진출 당시 


박찬호보다 더 성공할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미국으로 진출한 선수입니다. 하지만 여러차례의 


트레이드를 거치고 한팀에 정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몬트리올 시절에는 감독과의 마찰도 


있었고 일본인 투수 오카 도모카즈와의


폭행시비는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김선우의 경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당연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완봉승 경기 일 것입니다.


지금도 간간히 스포츠 방송에서 그 하이라이트를 방송해 주고 있더군요.



봉중근은 신일고 졸업후 타자의 신분으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였지만 구단의 권유로


투수로 전향하여 불펜과 선발을 오가는 보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팀의 유망주로서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기대만큼 


성장해 주지 못했고 애틀란타 이후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 이후


국내로 복귀 엘지트윈스의 마무리로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최근에 그 선수생활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1세대 메이저리거로는 보스턴에서 함께 


생활했던 조진호와 이상훈 선수가 있으며, 


타자로서는 시카고 컵스의 유망주 였던 최희섭이 있었습니다.






흔히 빅리그 2세대라고 불리우는 짧게 거쳐간 선수들입니다.


메츠에 입단했던 구대성은 한국과 일본을 거친 후


미국을 진출하였기 때문에 전성기는 훌쩍 지난 시기였습니다.


독특한 투구폼으로 처음에는 많은 이슈를 만들어 내었지만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랜디존슨에게 2루타를


친 후 홈으로 슬라이딩 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당하였다고 하죠. 


시즌 후 메츠는 그를 방출하였습니다.


박병호와 김현수 그리고 이대호는 각각 한국과 일본을 


거쳐 빅리그에 입성한 선수들입니다.



박병호는 빠른공의 대처가 이쉬웠고 김현수는 볼티모어 


입단 후 필리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팀의


리빌딩 선언 후 주전자리에 대한 확실하지 않은 


미래로 한국행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대호는 참 아쉬운 선수였던거 같습니다. 


분명히 경쟁력도 있었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림돌이었을까요? 컵스에 입단하여 유망주 


소리를 들었던 류제국도 점차 떨어지는 속구 구속과


팀의 사정으로 템파베이로 이적 후 국내로 유턴합니다. 


임창용 선수는 한국과 일본의 성공 이후 컵스에 


입단하였지만 많은 나이와 일본에서의 강력한 속구가


없어지자 팀의 신뢰를 잃고 역시 국내로 들어오게 됩니다.


가장 왜 미국을 갔지? 하는 선수는 황재균입니다. 


불과 6개월의 짧은 미국생활을 한 이후


국내로 돌아와 KT에 입단하게 됩니다. 


지금은 미국시민인 백차승은 시애틀에 입단하여 


역시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끊지 못하고


파드레스와 마이너리그를 거쳐 일본 오릭스에 


입단하게 되지만 1년만에 퇴출 당하고


지금은 두산의 2군 코치를 한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러한지는 모르겠네요.






앞서 강정호 선수가 있었지만 누락되었던것 같습니다. 


많은 사건사고로 인해 스스로 자멸을 선택하고


다시 피츠버그에서 그를 받아준것은 


그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또 한번 스스로 그 밥상을 걷어차지 않았음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코리안 메이저리거는 


이제 류현진, 오승환, 추신수입니다.


물론 내년에 강정호의 시즌이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오승환은 카디널스팀에 입단 후 스스로 자신의 


성적으로 팀의 마무리까지 꿰차는 좋은 모습을


보여준 후 팀의 사정상 토론토로 트레이드 후 현재 


콜로라도 로키스에서의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구위는 이전보다 현저히 떨어졌지만 오승환 특유의 


경기 운영능력과 강한 멘탈을 장점으로


아직까지 메이저리그에서 그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류현진은 올 시즌이 끝난 후 팀의 퀼리파잉 오퍼를 


받아들이고 다저스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간의 부상만 없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선수였다고 봅니다. 



류현진의 장점이라면 역시 강한 멘탈과 경기 


운영능력 그리고 팔색조로 변화해 나가는


다양한 구질이라고 볼수 있겠죠. 내년 이후 다시 


FA시장에 나와 더 오랜기간의 미국에서의


류현진을 보게 될것을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추신수입니다. 앞으로 2년간의 


텍사스에서의 계약기간이 남아있는데요.


많은 나이와 이제는 수비에서의 경쟁력이 


사라진 그를 데려갈 팀은 없어 보입니다.


텍사스가 보조연봉을 지급한다 해도 추신수를 


영입 할 팀은 없어보이는데요.


그래도 올시즌은 생애최초로 올스타에도 


선정되었고 출루 신기록도 세우는 등 


본인에게는 아마도 잊지 못할 시즌이었던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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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시즌이 빨리 오기를 누구보다 기다리는 야구광입니다. 


경기를 보면서도 실망하고 좌절하는 경기가 많지만 그래도 야구를 보면 흐뭇합니다.


오늘 포스팅은요. FA 이후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면서 메이저리그에 진출을 


희망하는 선수들에 대하여 조금 독한 포스팅을 하고자 합니다. 


해가 바뀌면서 점점 수준이 낮아지는 한국야구를 보는게 답답합니다.


천천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최초의 한국인 메이저리거는 박찬호입니다.


1994년.그것도 메이저리그 역대 사상 17번째로 마이너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로 진출하는 쾌거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박찬호는 팀의 기대주라는 명목하에서도 2년간의 


마이너 수업을 받고 1996년에야 다시 메이저리그에 콜업될수 있었습니다.



왜 박찬호는 2년 동안이나 마이너에 있었나?


17번째의 메이저리그 직행버스를 탄 박찬호였지만 다저스는 사실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상징성의 빅리그 입성이었고


그 다음해 메이저리그에 온 노모 히데오는 신인상을 타는 두각을 보여주었죠.



박찬호의 당시 경기를 자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범접할수 없는 구위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제구력, 그리고 멘탈...


2년동안의 마이너수업으로 더 배우고 오면 너를 팀의 에이스로 써주겠다




박찬호가 마이너에 있는 동안 노모 히데오가 10년 가까이의


일본프로야구 경력을 접고 메이저리그에 입성합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토네이도 열풍을 일으키고 맙니다.


기의 독특한 투구폼으로 인해 다저스는 계약조건에 투구폼을 바꾸지 말라는 


조항까지 넣을 정도로 그의 토네이도 투구폼과 열풍은 


당시 메이저리그의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제가 알고있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성공요인의 가장 큰 점은


바로 그의 승부근성입니다. 


전성기 시절의 박찬호는 멘탈이 약하다는 소위 새가슴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삼진도 많이 잡아 냈지만 경기당 너무나 많은 볼넷수


스트라익과 볼의 비율, 가운데로 꽃아넣지 못하는 약한 멘탈이


그의 발목을 잡기 일쑤였죠...




김병현의 등장 그리고 강한 멘탈



그러는 사이 같은 리그 같은 지구에 한국인 투수가 등장합니다.


바로 김병현입니다. 당시에는 사이드암의 투수가 많이 생소했던


메이저리그였습니다. 그것도 마무리 투수가...



멘타이의 부상으로 어부지리 팀의 마무리 보직을 맡게된 김병현


제가 본 김병현의 당시 가장 큰 장점은 과감한 승부와 


절대 쫄지 않는 멘탈이었습니다.


박찬호의 새가슴 투구를 보다가 김병현의 시원시원한 피칭을


보면 스트레스가 확 날아갈 정도였으니 말이죠.




KBO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도전 과연 이해할수 있나?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왜 계속 박찬호, 김병현 얘기만 하고 있나? 하실수 있겠지만


조금더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찬호의 연일 계속된 헤드라인 기사 그리고 이상훈...


박찬호가 이후 다저스에서 승승장구하면서 팀의 1선발까지


꿰차자 한국의 신문언론은 앞다투어 모든 스포츠 신문의 1면을 박찬호 기사로 


장식하였습니다. 이를 본 야생마 이상훈은 "아무리 국내에서 잘해뵜자


스포츠 신문의 1면은 박찬호 몫이다" 나는 해외로 진출한다 라며


일본을 거쳐 메이저리그 보스턴까지 가게 되었죠.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한국에서나 잘하지 너가 가면 뭘해? 나이 먹고?


결과론적으로 이상훈은 일본에서는 절반의 성공, 그리고 메이저에서는


존재감없는 그냥 그런 선수로 다시 몇년후 국내로 돌아올수 밖에 없었죠..






긴 마이너리그 생활.. 하지만 끝내는 올라갈수 없었던 메이저리그


롯데투수 송승준은 누구보다 고교졸업 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생활을 오래했던 선수입니다.


하지만 끝내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하고 한국으로 올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선우, 서재응, 조진호,류제국,봉중근 과 같은 한국 투수들이 메이저에 진출하는 것을


그저 멀리서 바라볼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송승준의 무엇이 메이저리그를 가로막았을까요?



송승준은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결국은 떼지 못했습니다.


마이너시절 올스타에도 뽑혔는데도 말이죠.



국내 고교를 졸업하고 미국야구에 진출한 선수 중 그 시대의 운을


타고나지 못한 선수라 생각됩니다. 


그가 메이저에 올라올수 있었던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말이죠..




미네소타의 박병호는 가장 안타까운 선수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에서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자신감있게 진출하였는데


빠른공의 적응력이 부족했다... 이점은 분명 자세히 볼수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이는데 한국에서 홈런왕이 빠른볼 적응력 부적응으로


빅리그 적응에 실패했다? 과연 그게 무엇을 뜻할까요?




보통 홈런을 펑펑 장타를 팡팡 터뜨리는 선수들은 직구에


강점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근데 박병호는 그러하지 못했다?


 


강정호를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강정호는 미국 간후


개인적인 구설수 개지랄 때문에 한시즌 전체의


성적을 기록한적이 없습니다. 데뷔시즌 중간에 빅리그에 들어왔고


그 다음시즌 중간부터 활약했을뿐 



중간중간 부상 경력도 있었고..





제2의 황재균이 나와서는 안된다.





사실 가장 이해할수 없는 빅리그 진출은 황재균입니다.


짧은 개월수의 마이너 시절후 운좋게 메이저 콜업


6개월 정도의 미국 생활후 국내 복귀..



대체 이게 뭔지..


도저히 쓸게 없습니다. 이 선수 왜 미국을 갔을까요?




김현수가 있습니다. 볼티모어에서 시범경기에서 너무나 저조한 성적으로


마이너행을 강요받았던 김현수..



하지만 김현수에게는 마이너 거부권이 었었고 보란듯이


시즌 들어와서 3할의 타율을 기록하였습니다.





류현진과 같은 빅리그 진출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선수가


필요합니다. 모 아니면 도 식의 도박은 빅리그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너도나도 빅리그를 찔러나보자 라는 식이 과연


과연 언제까지 통할런지요.. 


저는 현재 추신수를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추신수의 그 예전


빅리그에 대한 갈망과 열정 도전을 좋아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살찐


돈많이 버는 그냥 그런 평범한 선수로 보여집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빅리그는 절대 만만한곳이 아닙니다.


중남미의 내놓라하는 모든 야구선수들이 도전하는 그러고도


대부분의 선수들이 입성을 실패하는 곳입니다.



한국야구는 현재 2019년 현재 많이 퇴보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야구팬으로서...



우습게 알고있던 대만야구에게도 그것도 대만 사회인 야구팀이 섞여있는 팀에게도


고전하던 한국 프로팀입니다.


이건 생각 이상 오래갈수 있습니다.


현 시점 한국야구 수준은 너무나 떨어져 있습니다. 


발전할수 있는 계기의 필요가 절실합니다. 누가 할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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